여행/2018 러시아

러시아 여행기 3) 바이칼-알혼섬 : 바다같은 호수, 호수처럼 넓고 고요한 인심-1

굥스키 2020. 3. 10. 14:49

알혼섬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풍경

알혼섬에 내리자 이제 포장도로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여긴 더 이상 속세가 아니올시다.

차가 쓸고 간 곳에는 흙먼지가 자욱했고, 길거리에서 소가 멍때리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그렇게 차창을 통해 송전탑이 듬성듬성 세워진 산봉우리를 보며 숙소까지 달려갔다.

3일 동안 샤워도 안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새벽 4시부터 5-6시간 정도 역에서 픽업 차량을 기다리고

장장 8-9시간 정도를 달리느라 힘이 남아나지 않았지만, 언제 또 볼지 모를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기 위해

어떻게든 꾸역꾸역 잠에 들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픽업 차량이라는 게 숙소 전용이 아니라,

운전기사가 의뢰받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태워서 각 숙소에 내려주는 식인데,

그러다 보니 이 곳 저곳 들리면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태웠었다.

생각보다 한국인들이 꽤 많이 타서... 놀라진 않았다 솔직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널린 게 한국인이라 말할 것도 없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도 한국인 여성분 한 분 만났고,

알혼섬까지 가는데도 여성분 몇 명이랑 남자분 2명 탄 걸로 미루어 보아, 

스킨헤드니 인종차별이니 쌍팔년도 시절 루머를 아직도 수용하고 있는 것치곤 많이 오는구나 싶었다.

아마 한러 양국 간 무비자 시행과 여행 유튜버 '여락이네'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콘텐츠의 공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분들과는 대화를 못 나눴지만, 같은 차를 탔던 남자분들이랑은 어느 정도 말을 섞어보았다.

가는 길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 휴게소에서 점심 타임을 가지는데, 그때 남자분들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길래

우물쭈물 다가가 같이 먹어도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묻고, 흔쾌히 허락해주시길래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처음엔 중국인 분들과 중국어로 대화하고 그래서 중국인인 줄 알았다느니, 모스크바 가보니 시베리아 도시는 촌이라느니,

여행자 사이에서 오가는 흔한 썰을 풀고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다시 차에 타 무진장 지루한 시간을 목가적인 풍경에 하품을 불어넣으며 때웠다.

이 긴 긴 거리에 1000루블 밖에 받지 않았다는 게 미안한 느낌...이 있었을 리가 없다. (2018년 기준, 사실 오래전이라 정확친 않음.)

 

알혼 섬

 

한 분이 호숫가에서 텐트 치고 야영한다고 해서 저녁쯤 샤먼 바위 부근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 숙소에서 쉬었다.

나는 우선 체크인을 하고, 짐을 대충 풀어놓고, 지금 잠들면 저녁 약속을 못 지킬까 봐 미리 샤먼 바위를 보기로 했다.

아니, 우선 샤워 먼저 하고... 숙소에 샴푸가 구비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비누만 달랑 있었다.

부랴부랴 슈퍼 찾아서 겨우 가장 싼 샴푸 사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출발했다.

 

부르한 바위(샤먼 바위) 가는 길

어느 정도 길을 좀 헤매긴 했다. 여기가 외진 곳이다 보니 지도 앱이 잘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지도 앱 탓을 할 게 아니라, 지도 앱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를 탓해야지.

아니, 애초에 정보 없이 간 나를 탓해야지.

어찌 되었든, 걸어서 20-30분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알혼섬 부근에는 숙소 값이 좀 비싼 터라(특히 성수기 시즌이라 그런가...) 그나마 가격이 좀 낮은 곳을 선택했다.

니키타 하우스를 인터넷에서 많이 추천해주긴 했지만,

이런 곳까지 와서 사람 바글바글한 곳에 묵긴 싫기도 했고 비싸기도 해서, 부킹닷컴에서 대강대강 찾아서 묵었다.

 

미리 숙소에 대해 말하자면... 강추다. 후지르 마을 외진 곳에 있긴 하지만,

거기서 제공해주는 밥이 너무 맛있었고, 목조 건물이라 그런가 난방이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아 밤에 쌀쌀하긴 했지만

이불 잘 덮고 자면 또 그렇게 막 춥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인아줌마랑 거기 일하는 우즈벡 사람들이 너무너무너무 친절했다.

투어 예약도 다 해주시고, 애로사항 같은 거 있으면 금방금방 해결해주시고, 그 외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좋으신 분이셨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참고로 숙소 사진이 없음... 여행하는 동안 숙소를 안 찍었음... 도움 안 되는 여행기 같으니라고!)

 

부르한 바위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은 부르한 바위. 보정을 안 해서 하늘이 쌔하얗지만, 실제로 보면 하늘도 정말 맑고 물도 엄청 깨끗하다.

사실... 보정빨만 믿고 사진을 야매로 찍는 편이라, 보정 탓 좀 해봤다.

 

호수변으로 내려가는 길

이런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부르한 바위 주변 호수변.

이렇게 모래사장 깔린 곳에서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시간이 6시 반에서 7시쯤 되었으니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바이칼을 오는 여행객의 부류는 

 

1. 낮에는 해수욕을 즐기고 밤에는 보드카 파티.

2. 투어나 트래킹을 통해 바이칼의 아름다움을 만끽. (나 같은 부류.)

 

이렇게 나뉘어진다고 한다. 관광객과 피서객의 차이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

한 번 바이칼에 몸 담그고 싶어 떠나기 하루 전에 시도해보자 다짐을 했지만 결국엔 안 했다. 

이유는 다음 편에...

 

그런 건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보통 러시아인이고, 부르한 바위가 잘 보이는 위쪽에는 중국인이 가득했다.

 

부르한 바위 부근 자갈밭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안선

 

부르한 바위로 들어서는 길에 있는 샤머니즘적인 기둥. 예로부터 후지르섬에 살았던 부랴트 족은 부르한 바위를 신성시 여겼다고 한다.

푸르고 푸렀다. 새파랬다. 거제 겨울바다보다 더 새파랬다. 수평선을 쳐다보노라면 정말 바다가 아닌가 싶을 정도.

역시 이름값 하는구나!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가장 수심이 깊은 호수. ^^;

어찌 되었든, 여행 경비 문제상 알혼섬을 갈까 말까 고민했던 게 참 바보같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대 도심을 제외하고는 가장 긴 시간동안 머물렀지만,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돈 아깝다고 2박 3일로 끝냈다면 지금쯤 엄청난 미련이 남지 않았을까...

 

탁 트인 호수, 이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호안선, 푸근한 시골, 자유롭게 길가를 서성이는 소...

자기 자신, 즉 자아를 찾는다니 뭐니 여행작가니 인스타 감성변태들이 미사여구를 펼치지만, 솔직히 그건 좀 많이 구라다.

사람마다 여행을 바라보는 관점, 여행을 통해 느끼는 점은 각기 다르지만, 나는 오히려 나를 잃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것과 막다른 것과 부딪치면서, 그 환경 속에서 '나'는 '나'로써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언제 내가 바이칼 호수라는 장대한 서사시의 등장인물이 되어보겠는가.

내가 언제 길거리에서 멍때리는 소를 보고 귀엽다고 웃음짓고, 샤머니즘의 부산물을 보며 경외심을 가지겠는가.

한국으로 귀국하여 다시 '나'로 돌아갔을 땐, 일련의 유체이탈 행위는 안주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내가 나라는 개념에 묶여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좆같아서?

언젠가 따로 다루어볼 토픽이라 생각한다.

 

부르한(бурхан)보다는 약한 베테르(ветер). 구개음화 몰라서 안하는 거 아닙니다.
숙소 강아지... 아닐 수도 있다. 가물가물하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우즈벡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솔랸카와 빵, 그리고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기억은 잘 안난다. 

이래서 여행기라는 것은 제 때 제 때 써야되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약속시간이 다가와 다시 부르한 바위로 갔다.

길을 또 헤매는 바람에...일거다 아마도. 약속 시간보다 지체되어 먼저 감상들 하라고 하고, 맥주와 보급용 웨하스를 사들고 갔다.

 

노을.
소 팔자가 상 팔자.

 

거의 다왔다, 노을이 거의 질 무렵에...

 

노을이 끝나갈 즈음 샤먼 바위.

늦은 와중에도 사진 찍는 거 보니 그래도 계속 지각하고 싶나 보네.

어찌 되었든 도착을 했고, 오는 길에 만났던 2분을 만났다.

부르한 바위 부근 호수 모래사장 쪽에 텐트 쳤다고 그 쪽으로 오라고 했는데 

텐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 텐트인 듯 했던 게 있었긴 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알고 보니 나만 못 찾은 게 아니였다. 다른 한 분도 못찾으셔가지고 나랑 똑같이 찾고 계셨던 것이었다.

뭐 어찌어찌해서 위쪽에서 만났긴 했다. 앞으로의 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을이 다 져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부르한 바위.
기념촬영. 티스토리는 왜 얼굴가리기용 이모티콘을 제공하지 않는거냐 도대체 왜!
폼잡는 중.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 다음 날 각자 스케쥴이 어땠는지. 

한 분은 아마 호수에서 미역 좀 감는다 그러셨고, 한 분은 나처럼 북부투어를 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투어하는 동안 동선이 안 겹쳐져 도중에 만나진 못했지만, 아마 재밌게 잘 하셨으리라 믿는다.

뭐 아무튼, 여행얘기 같은거 좀 하다가 해가 완전히 질 때 쯤 텐트쪽으로 내려가 맥주를 꺼냈다.

Night is coming, becuz it is not winter.
파닥파닥파닥몬.
갬성사진.
짠!

평소에 술을 잘 안하긴 하지만, 여행을 하면 그 나라의 술 맛이 궁금해서 종종 마시곤 한다... 아니면 사람한테 맞춰주느라.

어찌 되었든 어두워져가는 바이칼호수를 보면서 마시는 맥주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그렇게 고되고 고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특히나 러시아는 여름에 낮이 길어 더욱이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한국인끼리 하루를 마무리짓고,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에 만나기로 했지만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결국 서로의 여행을 응원해주고 헤어졌다.

 

무사히 여행 잘 끝내셨길 바랍니다.

한 분은 몽골에서 잊지못할 은하수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셨길 바라고

한 분은 중앙아시아 여행 무사히 잘 마무리 하셨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사기 안 당하셨길...)

 

 

2편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