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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린부르크를 계획에 굳이 넣은 이유는 심미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피의 사원'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총살당하면서 제정 러시아가 끝이 났고,

유럽이랑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대도시라는 것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좋은 시설에서 정말 편안하게 쉬고난 뒤 (숙소 사진을 또 안 찍었네...)

아침으로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은 뒤 나가려고 할 참에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저녁에 갈 것 같으면 짐은 잠시 두고 가라고 말씀하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도시를 구경하러 갔다.

호스트가 알려준대로 숙소를 나간 뒤 조금 걸어가 마르쉬루트카를 타고 역으로 갔다.

가장 만만한 곳이 역이지, 뭐.

 

구 예카테린부르크 역.

택시바리를 피해 급하게 얀덱스 택시를 잡느라 역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기도 하고,

역 주변에 마침 또 지하철역이 있어서, 예카테린부르크 지하철도 타보자는 의의로 갔다.

내가 내린 곳 주변에 뭔가 옛스러운 건축물이 있어서 가봤더니, 구 역사라고 한다.

지금은 철도 역사 박물관으로 쓰이는 듯 했고, 주위에 동상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
철도 노동자
주변에 있는 건축물... 뭔지는 까먹었다. 부속 건물이긴 했는데.

대강 둘러본 뒤 바로 지하철로 향했다.

역시나 꽤 깊은 곳 까지 내려갔고, 리드미컬한 소음은 여전했다.

 

ISO 조절 실패. 아침이라 그런가 사람은 많이 없었다. 별 특징없는 전형적인 지하철 플랫폼.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한식당 '씨울(서울)'
예고르 크리드와 빅토르 최, 2010년대 팝스타와 1980년대 락스타.

바이네르 거리가 번화가라고 해서 지하철 역에서 내려 그쪽으로 무작정 향했다.

1905 광장 역(Площадь 1905 года)에서 내린 듯하다. 가물가물하구만.

노보시비르스크보다는 현대식 건물이 꽤 많이 지어진 듯했다.

- 사실 그렇게 단정 짓기 뭣한 게, 노보시비르스크 시내는 거의 못 둘러봤으니...

 

발쇼이 즐라토우스트 사원.
스탈린 동상은 없어도 레닌 동상은 러시아 전역에서 꽤 자주 보인다.
이제 얼추 다 온 듯 하다.

이젠 트램이나 트롤리부스를 봐도 그러려니 하다.

이르쿠츠크에서 처음 '전차'라는 것을 봤을 땐 꽤 설레고 그랬는데...

그래도 지금 다시 돌아보면, 뭔가 부럽긴 하다.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다는 게.

한국에서 도로교통이라 함은 버스랑 택시가 전부인데...

물론 전기선 따라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있으면 전깃줄 때문에 미관을 해친다고는 하지만,

그 전깃줄조차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낭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이네르 거리 초입부. 빨간선 따라 쭉 가면 주요 관광지 다 둘러볼 수 있음.

이르쿠츠크와 노보시비르스크에 비하면 정돈되고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노보시비르스크도 이런 공간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내가 본 것만으로 치면,

지방 중도시에서 광역시로 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도 정말 많았고, 거리도 널찍했다.

 

꼬치만타.

러시아는 한국에 비해 담배라는 것에 관대했다.

온통 '금연구역' 마크가 붙여져 있는 한국(특히 서울)과는 달리,

이런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흡연자인 나로서는 그런 면에선 정말 편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뭔가 익숙지 않아 복잡 미묘했다.

 

다 이루어 질거야. 뭐 그랬으면 하다.
행상인 동상. 왼손에 있는 물건을 만지면 행운을 깃든다...는 관광지의 흔한 클리셰.
반대편에서 찰칵.

 

사진 너무 많이 찍어주시는 거 아닌가요 하하핳;;;

행상인 사진 찍고 있었는데, 현지인 아저씨가 가는 길에 안쓰러우셨는지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주셨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요. 남쪽...ㅎ" "말라졪(멋진걸)!"

다양한 각도로 찍어주신 뒤 출신성분(????)을 묻곤 즐거운 여행돼라는 말과 함께 쿨하게 사라지셨다.

 

활기차다.
거의 끝자락인듯? 번화가에서 유유히 책을 읽는 모습보고 "와 역시 독서의 나라"다 싶었다.

꽃도 많았고, 벤치도 많았고, 동상도 정말 많았다. 그 많은 동상을 미처 다 찍지는 못했다.

... 감상하느라. 이 거리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타냐 아주머니의 조언대로 바죠프 선집도 샀다.

산업도시라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 강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오래된 거리라고는 하는데, 한 번 제대로 정비를 한 듯하다.

 

바이네르 거리를 벗어나면 이러하다.

골목골목 더 살펴보면서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피의 사원이 보고 싶기도 했고, 시간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고 관광객 라인을 살짝 따라가 보기로 했다. 

- 살짝이라는 말을 쓴 이유가, 몇 번 이탈을 했기 때문.

조금 더 있으면 강변이 하나 있는 것 같아 한 번 가봤다.

 

힙하면서 올드하면서, 어찌 달리 표현을 해볼꼬.
거진 도착한 듯. 저 뒤로 비소츠키 타워가 보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어딜가든 있는 사랑의 자물쇠.
다리 건너편. 어딜 가든 공사가 한창이었다.
날씨가 덥고 하니 아이스크림을... 솜사탕 맛이라고 하는데, 나쁘진 않은 맛이었다.

대강 둘러본 뒤 발 가는 대로 우선 걸어 다녔다. - 사실 길을 헤맸다. 

비틀즈 기념상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지도가 거짓말을 친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아마 후자인 듯. ^^

 

낡은 건물 뒤에 지어진(지어지는) 현대식 건물.
길 나는 대로 걸었다.

 

큰 연못 건너편에 작은 공원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저어 멀리 교회 종탑이 보이네.
보수중인 상인 추빌딘의 건물, 신축 중인 새 건물. 지금 보면 약간 아스타나의 건축물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작은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아마 상류층 거주지... 아니면 비싼 호텔...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19세기 맨션 판매. 530제곱미터.
고골아저앀ㅋㅋㅋ 고급스러운 자태 속 힙함.
19세기 후반 건축물. 용도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반대쪽 공원에서 다시 나가 피의 사원으로 향했다.

내가 간 곳 주변으로는 이런 붉은 계열의 19세기 말 양식의 건물이 많았다.

그때쯤 지어져 번성한 도시니... 노보시비르스크에도 많을 거라 생각이 든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장 높다는 비소츠키 빌딩. 닉값 하네.
그 주변엔 이렇게 비소츠키랑 그의 연인(?) 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앉아있다. 
저 멀리 있는 소련식 건물과 뭔가 일치한다. 오페라 발레 하우스.
스베르들로프 상과 오페라 발레 하우스. 그 뒤편에는 우랄 연방 국립 대학교.
이게 바로 우랄 연방 국립 대학교. 칙칙하면서도 고풍적이다.

조금씩 피의 사원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 온 주목적!

하지만 그전에 이미 나는 이 도시에 빠져 있었다.

사소한 볼거리와 사람 구경이 재밌었던 도시.

 

붉은 선 따라 쭉 가보자! 비눗방울 보소.
거의 도착했음을 알리는 쿼텟. 공원이 곳곳에 있었다.
성지의 느낌이 나기 시작.

 

피의 사원(Храм-на-крови)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는 황제의 은신처였던 건물을 허문 뒤

그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피 위의 사원'이라 불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유사품과 헷갈리지 않도록! (피의 '구원' 사원)

 

삼각대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이렇게라도.

잠시 역사적 상상 속에 잠겼다가, 길을 나섰다.

실내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안 들어갔다.

- 그래서 후회된다. 내부 구경은 다음에 하는 걸로.

 

여기 관광객 하나 추가요.
우랄지역 작가 박물관 외부. 저기 바죠프에 대한 설명이 있겠지...
 피의 사원 방향을 그리고 있는 화가.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동영상.

피의 사원에서 나와 다시 빨간 라인을 따라 걷자 정각을 알리는 종탑 소리가 울렸다.

여태까지 종탑만 봐왔지, 이렇게 종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뭐라고 해야 할까, 진짜 '러시아'에 와있는 느낌이 확 들었다.

뭔가 황홀하다고 해야 하나, 현대적인 도시 속 옛스런 종소리.

 

정교회 성당의 종소리는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 1악장 도입부, 차이코프스키의 1812 서곡,

그 외에도 더 있을 거라 확신한다. 뭐 아무튼,

그만큼 이 종소리는 러시아의 '시그니쳐 사운드'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종소리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 도입부를 떠올리며,

어떻게 표현이 되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을 해봤다.

 

'그럴싸하게 잘 표현했네.'

처음엔 댕-댕-댕- 하고 단음으로 울렸다가,

아르페지오를 연상시키는 세분화된 리듬으로 크고 작은 종소리가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것.

한동안 음악적 감상에 취하면서 우두커니 서서 종소리를 들었다.

종소리가 끝난 뒤, 다시 걸었다.

 

마침 푸쉬킨이...

 

그래피티. 루블루블달러달러.

 

도시 연못.

원점까지는 아니고, 이전에 갔던 작은 강보다 더 위에 있는 넓은 연못에 다 달았다.

현대적인 빌딩이 연못을 에워싸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카약을 즐기고 있었다.

뭔가를 새로이 짓느라 분주한 도시.
쾌속선도 종종 연못을 질주한다.

 

저멀리 시청탑.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 가득하다.
처음으로 산 마그네틱.

강변에 있는 보부상에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그네틱을 사봤다. 흥정해서 100루블 정도에 산 것 같다.

이때만 해도 각 도시별로 마그네틱을 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도지사 거주지. 아르누보 양식이 꽤 인상적이다. (아르누보 맞나?)

 

산책하러 나온 현지인들이 많이들 있다.
우리는 누군가,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옆에 피의 사원!
빅토르 초이!
고마워 부패경찰아... 그 옆에는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와 관련된 시.

반대편으로 가면 처음 내가 갔던 곳이 있다.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지하도에 빅토르 초이를 추모하는 그라피티로 가득 찼다.

그렇게 또 왔다. 낮 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쒐솨탕이 먼줘돠! 솜사탕한테 초점 뺏김.

 

이렇게 러시아 월드컵의 흔적도 돋보인다.
타티셰프(В. Н. Татищеву)와 겐닌(Г. В. де Геннину). 예카테린부르크 설립자, 1723년 건립.
예배당 - 분수 - 비소츠키
슬슬 산책할 시간이긴 하지.
난 슬슬 갈 준비를 해야 되고.

 

그렇게 시내 산책을 한 뒤, 짐을 가지러 숙소로 갔다.

비소츠키 타워 전망대로 가기 위해선 조금 서둘러야 했기에,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탄 뒤,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슬슬 예카테린부르크도 끝에 치달아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뭐 여행이라는 게 그렇지.

늘 아쉬운 법이지, 이런 짧은 순간과 순간이 끝난다는 것은, '나'로 돌아갈 시간이 임박해 간다는 거니까.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다양한 시각에서 봐보고 한다고 한 들 아쉬운 건 매 한 가지다.

 

아파트 방에 가보니 호스트가 딱 있었다.

잠시 베란다 쪽으로 가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숙소 어땠느냐니, 예카테린부르크는 어땠느냐니, 이제 어디로 가냐니...

택시 잡는 걸 두려워하자, 택시 잡는 것도 도와줬다. (듣기가 워낙 안 돼서....)

근데 문제가 있었다. 나한테 1000루블짜리 밖에 없어서, 택시들이 다 취소를 하는 것이다...

호스트한테도 잔돈이 없었고, 나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얀덱스 카드에 내 카드가 등록이 안 된 건 덤.

 

러시아는 어딜 가나 '잔돈을 남겨주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츄파츕스 하나 사면서 5만원을 낼 수 있는 우리나라랑은 천지차이인 것이다.

75루블 짜리의 물건을 살 때 꼭 5루블 있냐고 물어보고, 

돈 단위가 200, 500 이상으로 넘어가면,

어지간한 곳에서는 잘 거슬러주지 않거나, 썩은 표정을 지으며 거슬러 준다.

"우리 잔돈 없어."

 

참... 여러모로 불편하기도 하지. ^^;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천사 같은(?) 택시기사가 날 데리고 간다고 해서

호스트 개 좀 쓰다듬어 주다가 호스트 배웅 아래 떠났다,

다음에 예카테린부르크 올 일 있으면 반드시 거기서 묵겠다 약속하면서.

 

택시 때문에 시간이 꽤 지체되어 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맡겨두고 바로 지하철 타고

1905역에 다시 내려 반 경보 반 뜀걸음 식으로 비소츠키 타워까지 뛰어갔다.

- 이 와중에 돈은 아끼겠다고 대중교통을 탔다. 

 

해질녘의 예카테린부르크 전경을 보기 위해서 참 별 지랄을 다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느 정도 땀이 찬 상태로 표를 구입하고 (국제학생증 할인해서 150인가 200루블 줬을 것이다.) 올라갔다.

 

현대판 흐루쇼프카. 서울보단 낫네. 그렇게 막 획일화되어있지 않아서.
유리에 비친 잔상이 좀 거슬리긴 한다. 육안으로 보면 나름 운치있다.
저 드넓은 평원 아래로 뉘엿뉘엿 져간다.
야경을 못 봐 아쉽지만, 아경은 뭐 다음에 보는 걸로.
이렇게 보면 또 삭막-하긴 하네.
나름 괜찮네.

전망대를 막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서 '니하오!'하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니하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예카테린부르크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있을 동안엔 아예 못 봤다.

"하하... 저 한국인입니다만..."

"오오~ 한국에서 왔구나! 난 하바롭스크에서 왔어! 오호호홓~ 반가워~! 사진 찍어줄까?"

사진이라도 괜찮게 찍어 줘서 봐줬다;;;

 

지금은 "니하오!"라고 인사한다고 무조건 기분 나쁘고 그런 건 없다.

어차피 우리도 한국 내에서 서양 사람들 보면 영어 잘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미국 사람이라 주로 생각하듯이.

2019년 겨울 우크라이나 여행 초기까지는 '니하오!' 거리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아했지만,

(보통은 무시하고 가거나, 상황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안한 미소를 짓곤 했다.)

해외 생활이 길어질수록 무뎌지기 시작했다.

 

'뭐 차피 나도 슬라브 인들 보면 러시아인이라고들 생각하잖아.'

'나도 서울에서 편의점 알바 했을때, 프랑스 사람한테 러시아어로 말 걸었잖아. (물론 정중히 사과하고 프랑스어 조금 써줬다. 빠른 용서.)'

 

여러모로 생각해 보니, '나를 중국인으로 본다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뭐 어쩌겠냐'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후에 칼리닌그라드에서 "중국인이랑 한국인이랑 뭔 차이가 있다고 그래?"라는 말을 듣고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래, 엄청 무식한 사람이거나, 조금 더 친근감을 주고자 했지만 그게 서투른 것일 뿐이지.

행여 외국인이 '니하오!'거리면 눈 찢고 '칭챙총!' 거리지 않는 이상은 한국인이라고 일러둔다.

한국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영국,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같은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으로 가본 적은 없지만,

딱히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못 느꼈던 것 같다. 

굳이 세려 든다면,

라트비아에서 친구랑 이야기하면서 나를 보고 눈 살짝 찢는 제스처 취한 여자(나한테 직접적으로 보란 듯이 한 건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카자흐스탄에서 같이 교환학생 간 애들이랑 고기뷔페 가는 길에 "니하오!" 하면서 대놓고 비웃은 카작애들... (누가 누굴 비웃어? ^^)

딱 그 정도네.

 

슬슬 내려가보자. 좀 늦었구만.

 

역전호텔.
신 예카테린부르크역. 

도저히 지하철을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겨를이 되지 않자, 어찌어찌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중에, 나는 똥줄 타 죽겠는데, 취객이 나한테 호기심을 보이곤 했다.

나한테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아 적당히 받아쳤다. 동행한 여자들이 얘 술 좀 많이 마셨다며 미안하다고 한 건 덤. 

가끔씩 있는 일이다. 만약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으면 엄청 무서웠겠지.

어찌 되었든 택시를 타고 역으로 도착해, 역 앞에 있는 상점에서 먹을거리를 좀 사고,

캐리어를 찾고 기차 타러 갈 참이었다.

 

그. 런. 데.

 

짐꾼 새끼들이 나한테 사기를 쳤다.

기차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걸 교묘하게 이용해, 자기네들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난 처음에 그냥 기차 시간도 얼마 안 남고 했으니 자원봉사자거나 무료로 급히 짐을 옮겨주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내 표를 그냥 탁 보여주고, 짐 올려라고 한 뒤 무작정 달렸다. (돈 든다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승합장에 도착하니, 태도 돌변하면서, "어허이! 돈 줘야지!" 이러는 거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지만, 뭐 팁 같은 걸 바라는 건가 싶어 200루블을 줬다.

그러니까, 가격표를 탁탁 두드리면서 "이봐! 2000루블이야!"

가격표에는 250루블인가 그렇게 적혀있던 것 같았다.

"250루블이라고 적혀있잖아! 왜 말을 바꾸는 건데?"

"아니, 너 기차 시간 촉박했잖아. 원래 촉박한 시기에는 10배로 내야 돼. 특별히 500루블 깎아준 게 어디야?"

일단 말싸움할 시간조차 없어서 2000루블을 냅다 주고 캐리어를 채간 뒤 

출발 3분 전에 기차 칸에 도착했다.

 

속았구나... 나한텐 이런 일이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사람들은 꼭 그렇게들 말하지. 조심은 하면서도...

너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살짝 사람이 풀어지게 되고, 그때 속절없이 사기를 당하든 도둑질을 맞곤 한다.

나도 그런 사례가 아닌가 싶다. 너무 괘씸하지만, 쿠페에 타자마자(처음으로 쿠페에 타본다!)

건너편에 있는 할머님께 여쭤봤다.

 

"할머님... 혹시 역에서 플랫폼까지 짐 나르는 비용 혹시 얼마 정도 하죠?"

"음... 그거 사용 안 해봐서 모르겄는디? 한 200-300하지 않을까?"

"2,000은 아니죠?"

"어이고, 말도 안되지!"

"아... 사기꾼들이었구나. 어쩐지!"

"어이고, 그걸로 2,000루블이나 낸 거야?"

"네... 전 무료 서비스인 줄 알고 믿고 캐리어를 얹히고 플랫폼까지 갔더니만, 2000루블을 내라는 거예요!"

"허허... 조심했어야지. 안됐네."

손녀로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테마에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내 위칸에는 아저씨 한 명이 곤히 잘 자고 있었다.

아침에 도시락 하나 먹고 아이스크림, 솜사탕 빼고 아무것도 안 먹었다 보니 배가 고파서,

일단 착잡한 와중에도 도시락을 폭풍흡입(!)했다.

 

애초에 비소츠키 타워 갈 때도 택시를 타고 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이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을 거고, 속절없이 멍청하게 사기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예카테린부르크는 좋다가 마지막에 빅엿을 날려준 도시였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

"네, 좋은 교육받았다고 생각하려고요."

 

나긋나긋한 노래와 함께 손녀를 간지럽히며 놀아주는 할머니,

잠에 들다 못해 곯아떨어진 아저씨,

사기당해서 멘붕 당한 한국인,

그렇게 쿠페 속은 평화롭기만 했다.

라면 다 먹고, 잠에 겨우 들었다.

할머님이랑 손녀분이 내릴 때쯤 잠에 깼고, 할머님 짐 옮겨 드린 다음에 (좀 무거웠다.)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같은 방 안에 나와 어떤 남자분 한 명이 옷매무새를 갖추고 있었다.

어제 잠에 곯아떨어진 아저씨 분도 자는 동안에 내린 듯하다.

 

사샤와 그의 아내, 따님에게 행복한 가정을 기원합니다.

 

"혹시, 러시아 사람이세요?"

"아뇨, 한국인인디유."

"우와! 개신기... 기차 타다가 외국인은 또 처음 보네!"

"엥? 외국인을 한 번도 못 보셨다고요?"

"넼ㅋㅋ... 와 개신기해! 아니, 한국인인데 러시아어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학교에서 전공 중이에요! ㅎㅎ"

"와, 멋있다. 어디로 가세요?"

"카잔이요. 님은요?"

"전 #$^@%로 가요. (확실한 건 카잔은 아니었다.) 가족들 보러 가는 길이에요."

2-3시간 대화 좀 나누다가, 남자분 먼저 내리시고 (그 와중에 인스타 주고받음)

혼자서 카잔까지 갔다. 종착역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모처럼 쿠페 탔더니 이렇게 텅 비네..

타냐 아주머니께서 주신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차창 풍경 감상하며 나머지 1시간 반 정도 동안 홀로 카잔으로 향했다.

 

2018년 여행 사상 가장 조용히 간 구간이다.

사기당한 거 반성하라는 거지, 뭐.

 

>_<

 

자 그럼, 가자, 타타르스탄으로.

모스크바가 머지않았네.

러시아 여행의 반절이 지나갔네. 

전체 여행의 1/4이 지나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