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이라는 도시에 3박 4일이나 머물게 된 이유는
문화적 제3의 도시라는 현지인들의 말과, 새하얀 크렘린이 이뻐서였다.
정말 막무가내였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 간 것이다.
그래도 운 좋게도, 현지인과 2차례나 동행함으로써 특별한 기억을 남긴 도시이기도 하다.
월드컵으로 인해서 카잔이라는 도시가 더 애정이 가기도 했고.
- 바로 이 도시에서 한국이 독일을 2:0으로 무찔렀다.
서막은 이렇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러시아 여행 사진을 올리니,
꽤 오래전에 잠시 연락을 주고받았던 여자애한테 DM이 왔다.
"러시아 여행 중이야?"
"응."
"어디 어디 갈 거야?"
"음, 블라디,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카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렇게 계획 중이야."
"카잔? 오! 나 거기 사는데! 카잔엔 언제 올 계획이야?"
"7월 23일에 아마 갈 듯?"
"아... 아쉽네. 그때쯤이면 아마 고향 집에 있을 땐데 ㅠㅠㅠ"
"아... 다음에 만나던가 해야지..."
"아니면 내 친구들 소개해줄까? 외국 문화에 관심 많은 친구들이야."
"나 낯 많이 가리는데 괜찮을까?"
"뭐 나쁠 건 없어. ㅎㅎ"
그리 하여 무료 가이드를 예약(?)하게 되었다.
우선 카잔에 온 첫날엔 몸도 꾀죄죄하고 하니 그렇고 둘째 날에 만나기로 했다.
도착을 하고 나서 체크인 타임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크렘린이라도 좀 둘러보기로 했다.
걸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 거리라 쭉 걸어갔다.
내가 카잔으로 온 주된 이유. 무려 3박 4일이나 머물게 된 이유.
막대한 기대를 품으며 여행을 하면 늘 실망한다고는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실망감이라기보다는, 마치 자격증을 딴 뒤에 늘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기쁨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것. 다만 기쁨에 초점을 더 두면 그건 황홀함이 될 것이고,
공허함에 초점을 두면 실망감으로 변질될 뿐. 내 기분은 '기쁨'에 더 초점이 주어졌다.
내겐 다소 낯선 이슬람 문화(그게 익숙해지다 못해 지긋지긋한 날이 올 줄이야 상상이냐 했겠는가...)
낯선 언어로 병기된 간판들, 우즈벡어로 '도프'라 불리는 모자를 쓴 나이 지긋한 타타르인들
단지 크렘린의 정갈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낯섦 속 낯섦'의 아름다움에서 온 기쁨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멍하니 봤다. 수많은 관광객들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감상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마냥 혼자만 즐길 순 없는 거잖아. '많은 인파'의 요소조차 즐기기로 했다.
가로등의 디테일함이 눈에 띄기도 한다. 달팽이 집 모양으로 돌돌 말린 데 걸린 등불.
고풍스러우면서도, 이슬람 사원과도 어울리는 그런 디자인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아무리 관광지 관리를 더럽게 못한다고는 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도시로서, 아니면 월드컵 개최지라 그런지 싹 보수를 한 건가...
-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
서쪽으로 갈수록 대체로 건물이 정갈해지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돈되고, 색감도 선명하고.
물론 옥에 티는 어디든 있는 법이지만.
입구 쪽에는 시계탑 겸 종탑이 있었다. 바로 저 앞에서 티켓팅을 했던 걸로 기억.
다음에 들어가야지 하고 체크인 시간까지 외부만 차근차근 구경했다.
편견이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나는 '타타르스탄'이라고 해서 이슬람적인 풍경이 뿜뿜 풍기거나 그럴 줄 알았다.
몇몇 모스크를 빼놓고 보면, 카잔이라는 도시 자체에는 러시아인이 많이 살아서, 자연스럽게 융화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 유럽풍의 느낌이 더 강했다고나 할까.
내친김에 바우만 거리도 좀 구경해볼까 하고 크렘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쭉 갔다.
배를 대강 채운 후, 체크인 시간이 다 되어 슬슬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역으로 가 캐리어를 찾고 택시를 타고 갔다.
에어비앤비가 늘 그렇듯, 조금 외곽에 있었다. 외곽에 있는 아파트 단지여서 길 찾는 데 좀 헤매었던 것 같다.
몇 동 몇 호라 주소는 적어놨지만 그게 어딨는지... 열쇠를 우편함에 넣어놨다는데 그 우편함이라는 게 어딨는지...
계속 남에게 재촉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고 또 찾았다.
주민들의 눈초리는 덤. - 뭐야, 저 얼빠진 여행객은?
어찌어찌해서 결국 찾았다. 우편함 속 짤랑대는 이물감이 느껴져 너무 기뻤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쳤고, 사진 정리 좀 하고 휴지기의 시간을 가졌다.
디비 누워서 내일 만날 친구들과의 약속 계획을 잡고,
여행 초기에는 1분 1초가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애를 썼지만,
2주 정도가 지나고 나니 되게 여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하나...
굳이 하나하나 다 보려고 애를 써야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나라도 더 보면 좋기야 하지, 허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도시의 느낌'을 받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와 이쁘다, 멋지다, 웅장하다, 유럽같다(?!)라는 말을 넘어서서,
현지인처럼 섞여도 보고, 다른 길로 새어 보기도 하고, 일정 취소도 한 번 해보고,
말 그대로, 도시가 주는 느낌, 나라가 주는 느낌이라는 것에 좀 더 초점을 주다 보니,
마음이 한층 여유로워진 것 같다.
랜드마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그 도시를 느끼는 것이다.
인터넷이 잘 되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사진으로도 충분히 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만,
사람 구경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다른 것이고, 도시의 향기, 도시의 분위기란 오직 여행으로만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어떻게든 내 게으름을 변명해 보았다. 일부는 동감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남은 일정 동안 늑장을 좀 부린 건 후회가 되긴 한다.
그랬기 때문에 조금 외곽에 있는 '만종교 사원'을 가보진 못했으니.
어쨌든, 카잔 여행기에는 사진이 그렇게 많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동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같이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더 할애했으니.
- iso조절이 계속 엇나가서 그런가 제대로 찍힌 사진이 많이 없다. ㅎㅎ;
거기에다가 3번째 날은 완전히 한 나절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니.
아쉬웠지만 아쉬웠으므로 또 가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3박 4일간 추억이 아쉬운 게 아니라, 그동안의 나태함이 아쉬운 도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폭넓게 도시를 느낄 수 있었음에도,
- 물론 숙소가 아늑하니 괜찮은 것도 있고, 중심지와 거리가 먼 것도 잇지만 -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웠을 뿐. 시간 분배를 잘 못했다는 것이지.
그래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크렘린은 원 없이 봤다.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는 걸로.
2편에서 계속
ps.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