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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니아, 세르게이와 헤어진 뒤 스탈로바야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사진도 찍어놓지 않아 조금 아쉽긴 했지만, 뭐 크게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다.

바우만 거리 동상에서 사진찍는 관광객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질녘의 크렘린.
카잔 크렘린, 야간.
크렘린 뒤편.

 

해가 질 때 까지 바우만 거리를 좀 걷다가, 크렘린으로 가서 또 산책을 했다.

해가 조금씩 져가고, 가로등에 불이 붙었고, 쿨 샤리프에 조명이 빛났다.

그냥 가만히 걸었다. 그래 크렘린이라도 원없이 보자고!

흠이라 함은 삼각대가 없어서 많이 아쉽긴 했다...;

ios를 낮추고 찍었는데도 흔들리곤 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진 못했다.

 

농민 궁전, 야간.

농민 궁전도 퍽 이뻤다. 가운데 나무는 언제 봐도 인상적이었다.

더 걸어볼까 하다가 하루종일 걸은 탓에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진 정리를 좀 하다가 푹 뻗었다. 원래 그 다음 날 모든 종교 사원을 가려고 했으나

늦잠 + 정보 부적 + 늑장으로 인해 그냥 오후까지 집구석에서 쉬었다.

 

소시지가 많이 싸길래 라면에 넣어 먹었다.

라면과 소세지로 배를 잔뜩 채우고, 3시 쯤에 다시 시내로 향했다.

알차게 하루를 채우고 싶었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격과 오랜 여행으로(당시로서는 최장기간 최장거리 여행이니...) 지친 탓에

모든종교사원(혹은 통합종교사원)은 포기하기로 하고, 크렘린 내부 구경과 소련 생활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크렘린 내부.
쿨 샤리프. 짙은 에메랄드 빛을 가진 돔이 인상적인 모스크.
삼각대 또 놔두고 왔어... ^^;

시계탑 밑에 있는 문을 통과해보니 (기억 상 무료였던 걸로 기억...) 크렘린 내 여러 건축물이 펼쳐졌다.

하얗고 파랗고... 뭐 그랬다. 그 청량감이 정말 좋았다. 여태까지 그 어떤 러시아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느낌.

바우만 거리나 그 일대를 돌아다녀 보면, 과연 이 곳이 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들의 도시가 맞나 싶겠지만,

타타르인의 종교이자 정체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쿨 샤리프가 아닌가 싶다.

크렘린 안에 모스크? 크렘린 하면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주로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낮선 조합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정말 조화로웠다 생각이 든다.

 

모스크 내부. 저 때 촬영 실력이 너무 아쉽다.
아랍어를 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코란을 읽고 있는 성직자가 나긋나긋하면서도 이국적인 선법으로 알라의 말을 읊조리고 있었고,

관광객들과 예배객들이 섞여 약간은 정신사나운 느낌이 좀 들었지만,

사소한 동선의 엇갈림과 약간의 소음은 그 건물 자체에서 풍기는 고유의 경건함, 근엄함을 뒤엎을 순 없었다.

저 날 모스크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봤는데, 그야말로 압도당했다.

 

쿨 샤리프 앞 전경

대강 둘러보고 나왔다. 그리고 길이 나 있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항상 어딜 가든 거의 무계획으로 다니기 때문에, 그만큼 타국으로 떠날 때 큰 정보 없이 무작정 떠난다.

비슷한 모습의 도시를 계속해서 다니다 보면 질리는 감이 있지 않냐고 물으면, 내 답은 이러하다.

 

"마술의 비밀을 알고 나서 마술 공연을 보면 재미가 반감이 된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불완벽한 내 감각으로 새롭거나 진부한 것에 감탄하고 지겨워하고 싶다.

대략적인 카탈로그를 짜는 것도 괜찮지만, 카탈로그에 명시되지 않은 루트에서 종종 경이함을 느끼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그냥 핑계다. 게을러서 그렇다.

 

성모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 그 뒤에 초록색 건물은 타타르스탄 대통령궁.
슈윰비케 탑, 저 멀리 볼가강과 신시가지.
크렘린 전망대

슈윰비케 탑을 본 방향에서 오른쪽 길로 새면 이렇게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강 규모만 봤을 땐 거의 한강 수준이지만, 사실 저 멀리 보이는 강은 볼가강으로 흐르는 한 강줄기라는 것.

실제로 볼가강은... 어마어마하게 폭이 넓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그랬다.)

 

강 너머로는 아파트 단지가 많이 보인다.

월드컵의 영향으로 꾸준히 새건물을 올리곤 한다고 다음 포스팅에 언급할 동행이 설명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구도심이든 신도심이든 도시가 되게 정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깔끔한 빈티지, 잘 복원된(?)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잔은 분명히 맘에 들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최대 수혜 도시...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색한 포즈 어쩔...

인생샷은 틀렸다. 풍경이 안 이쁘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속에 잘 안 어우러지는 느낌이 심하게 든다.

뭐 아무튼, 강 보면서 멍 때리다가 크렘린에서 나갔다.

 

나가는 길. 왼쪽 건물은 공사중이었다.
여객 마차라고나 할까. 안 그래도 하양하양한 도신데, 말까지 백마다. 급하게 찍어서 초점이고 자시고...

바우만 거리 끝자락 쯤에 있는 소련 생활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마침 주현절 성당 종탑이 보여서, 엄청난 전망을 기대하고 올라갔다.

아마 입장료를 낸 것 같은데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찌 되었든 올라가봤다.

 

종탑에 있는 종. 어쩐지 가끔씩 뜬금없이 땡 하고 울렸나 싶었다. 관광객의 짓이었어!
다들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길래 나도... ㅎㅎ
전망은 쏘-쏘. 추락 방지 쇠창살이 있어 전경을 온전히 감상하긴 힘들었다.

높다란 종탑을 오르내리면서 개고생 좀 하다가 (종 사진 하나 건지긴 했지만...)

이제 진짜 나의 덕력을 만족시켜줄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

 

이름하야:

사회주의 생활 박물관, 소련 생활 박물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지?

원래 여행 갈 때 박물관은 잘 안 가는 편이지만, 바우만 거리와 크렘린 외에 어느 정도의 루트 변화를 두고 싶었다.

마침 70~80년대 소비에트 문화 덕후인 만큼 이 박물관은(!!)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 가격은 국제학생증 있으면 150루블, 없으면 250루블! (사실 표 가격 까먹어서 구글링했음...;)

이름 그대로 소련 시절의 물건을 이것 저것 전시해 놓았다. 너무 이것 저것이라 행복했다. (?!)

그만큼 볼 것도 많고, 특히 해빙기 시절 소련 문화에 관심이 많다면 정말 추천하는 장소다.

 

 

1977년 카잔에서 공연했을 때 받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싸인.
소련에서 최초로 생산된 청바지 "트베리(Тверь)"
ВЕСНА-202, 70~80년대 소련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카세트 플레이어.
"아디다스 신발을 신는 사람은 내일 조국을 팔아넘길 지어니!" 1980년대 아디다스를 향한 소련인의 시선.
유리 가가린이 카잔에서 찍은 사진. 수용소 <볼가>에서, 1967.
뱃지나 선전포스터 마그넷 같은 기념품도 살 수 있다.

사진은 더 있고, 사진으로 담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있어서 카잔에서의 일정이 널널하면 한 번 방문해보는 걸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돈을 조금은 아낄 필요가 있어 기념품을 사진 못했다. 소련 구제(?) 옷도 몇 개 팔았었는데, 꽤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덕심을 충족시킨 뒤 나가서 전날 갔던 카반호수 근방과 바우만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사진을 많이 찍진 않았다. 

그냥 거리를 온전히 느껴보고 싶어서 잠시 촬영은 접어두기로 했다. 

 

아예 안 찍진 않았고, 그냥 몇 컷만 찍었는데, 괜찮은 사진이 영... 없네.

 

저 멀리 보이는 갈리아스카르 카말 극장.
카반 호수.
바우만 거리, 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
해가 져가면서 제법 선선해지니 길거리 악사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카잔도 슬슬 끝이 보인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을 것 같으면서도 나름 특별했던 하루였다.

모스크라는 곳을 처음으로 들어가 봤고, 종탑에도 처음 올라가 보고, 소련시절 물건들과 영접도 해보았다.

 

피로가 많이 누적되었긴 했지만, 모스크바에 대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조금씩 피로가 희석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날 밤은 카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완전히 다 싼 뒤,

그 다음 날 만날 '알리나'와 약속시간을 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카잔역 물품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바우만 거리로 가 점심을 먹고난 뒤 카페에서 기다렸다.

'알리나'가 누구냐 함은... 숙소 체크인 전에 카잔 크렘린을 둘러보고 있을 때 만난 여자 아이였다.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친구였고, 나한테 먼저 다가가 다짜고짜 카톡 번호를 땄다.

그 다음날에는 선약이 있어 약속을 잡지 못했고, 그 다음 다음날에는 알리나가 시간이 안 돼서,

카잔에서의 마지막 날에,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보기로 했다.

 

지금은 알리나와 연락이 되진 않는다. 하도 연락을 안해서 먼저 인스타를 언팔한 모양...

뭐 그래도 알리나 덕분에 카잔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알차게 보냈고, 잊지 못할 추억을 또 선사해줬다.

뭐 알아서 잘 살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음 포스팅을 언제 쓸 지 모르겠다. 여행기 쓰는 게 슬슬 귀찮아졌다.

무려 2년 전 일이라 살짝 가물가물해졌으니 추억을 끄집어내는 데 은근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기억이 많이 바래진 경우, 약간의 소설도 써야 하고... 

이래서 여행기는 그 때 그 때 작성했어야 했어. 제길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