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조식을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되게 일찍 나갔다.
선창가의 위치를 알려주셔서 얀덱스 지도에 좌표 깔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함이 엄습했다.
또 길을 헤맬까봐...
그렇게 한 시간이나 일찍 선창가에 도착해서 하염없이 여객선을 기다렸다.
여기서 타는 게 맞나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 배 중에 내가 탈 배가 있기나 한 걸까...
심지어 이런 상상도 했다, 유람선은 무슨, 걍 어선에 태워서 어촌 체험시키는 건 아닐까...
방금 좀 무리수를 둔 것 같다.
그렇게 좀 기다리다 보니 40분쯤인가 큰 어선이 도착했고, 사람들도 꽤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 줄을 선 뒤, 숙소 주인아주머니의 이름을 댄 뒤(예약을 아주머니 성함으로 하신 듯) 탑승했다.
실내 좌석도 있었고 야외 자석도 있었다. 출발하고 얼마 동안은 실내 좌석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담요를 가지고 위층 야외 좌석으로 가길래
나도 따라 올라갔다. 그러니 가이드 분께서 뭘 설명하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 관한 이야기와 여행 일정, 여행지 설명을 했는데, 뭐 당시에는 대략적인 내용만 이해했다.
즉,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이 떠난 거나 마찬가지다.
한국인들 블로그를 보면 배 타고 쭉 갔다가 복귀할 땐 차 타고 복귀한다고 하는데,
난 아마 다른 투어였나 보다.
뭐 아무튼, 유람선 투어의 의의는 호수에서 뭍을 보는, 이른바 시선의 변화가 아닐까.
유람선을 탄다는 정보만 있는 지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멀어져 가는 섬과 간혹 나오는 바위섬을 보며 오고이로 향했다.
갈매기한테 빵 던져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가만히 배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경치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배에서 본 느낌은 확실히 민둥산의 느낌이 강했다.
원시적인 느낌이 충만했고, 저기서 유목민들이 유르트 세워 말 타고 돌아다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어 보였다.
옛날 원주민들은 그랬겠지 뭐.
호수에 크고 작은 섬이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냥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사진만 딱 보여준다면 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중국인도 봤다. 이번 투어에는 한국인들이 없었고, 대신에 중국 자유여행객 2분인가 이렇게 계셨다. 대학생이었다.
별 얘기는 안 했다. 웨어 알 유 프롬? 아임 프롬 코리아! 캔 유 테잌 어 픽쳐 오브 미? 두 유 노 애니띵 어바웃 디스 투어?
이 사람들도 나랑 똑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더라.
그렇게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오고이 섬에 도착해 있었다.
예전엔 사람이 살았지만 이젠 무인도가 되었다는 말 정도는 알아들었다.
자, 어디 한 번 사람이 떠나간 빈집을 헤집어볼까나.
그렇게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이런 신전 비스무리하게 생긴 곳에 도달하게 된다.
올라가는 길에 돌탑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전날 하보이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르게 생긴 돌탑이 많았다.
이 건축물을 기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3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본래는 집착을 넘어선 깨달음을 목표로 빙빙 돌았겠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이렇다.
풀밭을 살펴보면 특이하게 생긴 돌탑이 굉장히 많다.
섬에 길쭉한 돌이 많은 특성상, 3-4개의 돌을 기울여 세운 식의 형태가 많이 보였다.
조심하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발에 채일 수도 있으니 조심히 다니곤 했다.
실수로 하나를 쓰러뜨려 하나 다시 세우고, 사사로운 마음에 본인 것도 하나 쌓으며 소원을 빌었다.
'카자흐스탄 교환학생 시절 뜻깊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가족과 친구,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소서.'
'음악가가 되었든, 전공을 살려 무역회사에 취직하든,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바라는 것을 모두 다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내 마음속 평정심을 누릴 수 있는 품성을 주소서'
하산하여 배가 출항할 때까지 해안선을 잠시 걸었다.
깨끗한 바이칼의 물이 조금씩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되어 배가 출항했다.
다음 장소로 가는 길에 점심시간이 되어 배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차와 시(щи), 그리고 양배추 샐러드, 다소 평범한 식단이었다.
점심시간이라는 걸 늦게 깨달아 줄을 엄청 섰어야 했다.
가족 단위나 연인 단위, 친구 단위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낯선 사람들 옆에서 밥을 먹는 내가 처량해지곤 했다.
... 그럴 리가 처량하다니, 처량하다는 것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나 느끼는 거지.
그냥 낯선 사람과 부대끼며 먹는데 느끼는 어색한 감정을 처량하다고 표현한 것 같다.
다음 목적지는 이르쿠츠크 방면에 있는 곳이었다. 역시 정보가 없는 상태라 내리고 봤다.
그리고 뒷사람을 무작정 뒤 따라갔다. 여기 온 목적이 뭔 지도 모른 채.
평화롭기만 하다. 여기도 소 팔자가 상 팔자.
마치 야트막한 산을 등산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올랐다.
내려가는 길에 찍으려고 올라가는 길에는 사진기를 거의 들지 않았다.
여기를 들린 목적은 바로 이 샘물이었다. 어쩐지 페트병을 챙겨가는 사람들이 많다 했다.
나는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손 좀 적시고 3-4모금 마신 뒤에 바로 하산했다.
이 곳 사람들은 성수로 여기는 듯했다. 주위에 샤머니즘적인 상징체가 꽤 많았다.
물 맛으로 말하자면, 등산을 하고 마셔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청량감이 장난 아니었다.
물에서 정말 깨끗한 맛이 났다. 군더더기 없는 맛이었다.
하산할 때서야 비로소 사진기를 들고 이것저것 찍었다. 야생화, 오솔길, 그리고 나비.
솔직히 나비 찍느라 시간을 꽤 허비하긴 했다. 기본 제공 렌즈를 쓰다 보니 근접샷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하산을 하다가 유람선에 처음 탔을 때부터 안면이 조금 있었던, 하지만 말을 섞진 않은 남자분이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너 물 마셔봤어? 맛 어떻디?", "네 동행은(중국 분들)? 아, 동행 아니라고? 혼자 온 거야? 안 심심해?" "어디서 왔어? 오~ 한국?"
오고이로 가는 길에, 잠시 화장실 갔다가 나오니까, 나를 흠칫 보더니, 손가락으로 "룩!" 하고 뭘 가리키고는 유유히 사라졌던 그분이었다.
이 남자도 여자 친구랑 휴가차 놀러 왔는데, 여친 분이 피부가 새까맣게 탄 걸로 봐서 썬텐을 엄청 한 모양이었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도 좀 오가다가 조용히 출발지로 걸어갔다.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 있어서 선착장 주변의 간이 슈퍼에서 맥주랑 마른 고기를 좀 뜯어먹었다.
내려올 때 같이 동행했던 커블과 합석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일을 하는지, 여행은 왜 온 건지, 러시아는 어디 어디 가봤는지.
통성명도 했다. 남자의 이름은 바실리, 여자 이름은 디아나였다.
바르나울에서 온 20대 후반의 신혼부부고, 파벨은 바르나울에서 경찰로 일한다고 한다.
경찰 신분증(?)을 나한테 보여주면서 증명하더라. 삼보 할 줄 안다고 그러기도 했고.
어쩐지 등빨이... 장난 아니었음. 약간 올리버샘 느낌 나는 외모였다.
상점 방명록에 한글과 러시아어로 낙서하고, 한글을 쓰는 나를 보고 되게 놀라기도 했던 것 같다.
"아니, 너 그렇게 많은 상형문자를 어떻게 다 외우고 써?", "한글 상형문자 아인디...." "읭?"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서 크라스노야르스크 안 갈 거라고 하니까, 되게 아쉬워하기도 했다.
거기에 이쁜 공원들도 많고, 자연경관도 괜찮다며 추천을 해줬지만,
이쁜 자연경관은 많겠지... 크라스노야르스크주가 러시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연방주인데.
근데 도시 자체가 이쁜 건 다 옛말인 듯했다. 체호프가 크라스노야르스크가 그리 이쁘다 표현을 했지만,
아마 소련 시기에 흐루숍카로 도배를 하면서 전형적인 소련형 도시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다음에 한 번 가본다고 하면서 마무리 지었다.
바르나울에 대해 물어보니, 도시는 볼 게 없고, 좀 나가면 엄청난 자연경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도 했다.
바르나울이 알타이 주도니까...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많겠지.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맞은편에 앉은 울란우데 출신 여자들이랑도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유람선 여행 끝물에 동행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많은 관심을 보이곤 하더라.
그렇게 막 수다를 떨다가 배 시간이 되어 배에 탔다.
객실 내에서 수다를 이어갔다. 자기네들끼리 울란우데는 어떻다, 바르나울은 저쩧다...
그 와중에 부분 부분만 이해를 하다 보니, 대화에 쉽사리 낄 수가 없었다.
계속 웃다가 농담 같은 거 이해하면 가끔씩 웃고 그랬었다.
객실 내에서 이야기 좀 나누다가 선착장에서 먹은 술도 좀 깰 겸 나갔더니
울란우데에서 온 어떤 아저씨께서 또 나한테 엄청 말을 걸어오셨다.
바이칼을 기준으로 저쪽이 이르쿠츠크고 저쪽이 울란우데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
울란우데 쪽에서 보는 바이칼도 기가 막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고,
당시에는 심도 있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던 지라 기억이 나진 않았다.
되게 인상이 전형적인 살집 있는 한국 아저씨였다.
뭐, 부랴트 족이 한민족이랑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고야 하지만..
그렇게 유람선 여행이 끝났지만, 하루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배에서부터 "이것도 인연인데 밤에 호숫가에서 보드카나 까자"는 제안이 오가서, 이것도 추억이다 싶어 나도 동참했다.
숙소에 도착해 어느 정도 개인정비를 취하고 저녁을 먹고, 장 보러 같이 나왔다.
보드카랑 음료수랑 컵, 요거트 조금... 끝? 역시, 불곰들, 안주 따위 없었다! 제기랄!
그 전 전날 한국인 2명을 만났던 시간대에 보드카 파티가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농담이 오가고, 은어도 몇 개 알아가고, 몇몇 썰이 오가지만,
맙소사, 무슨 말하는지 잘 못 알아먹겠다!
지금 실력이라면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너무 부분적으로만 이해를 해버려서 전체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보드카는 계속 들어가고, 취기는 급속도로 올라가고... 결국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бухать"의 뜻을 물어봐서 엄청 웃은 것, (직역하면 쿵 떨어지다, 은어로 의역하면 술을 진탕 마시다.)
디아나가 뭐라 뭐라 질문했는데 못 알아먹어서 4명이서 한꺼번에 이해시키려 드는 것,
바실리가 뭐라 뭐라 섹드립 날렸는데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설명하기 난감해했던 상황,
보드카가 다 떨어지니 어느 펍 같은 데 들어가서 흑맥주 마신 것,
마침 TV에서 방영되는 2018 월드컵 프랑스 대 크로아티아 결승전 후반전,
바실리랑 노상방뇨한 것...... 이 정도?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을 거다. 뭐 왜곡됐으면 왜곡된 대로~!
아참 그리고 아침에 눈 떠보니 귀소본능에 소름 돋은 것까지... 이것도 쳐야 되나?
어찌 보면 그때
처음으로 러시아 사람들이랑 보드카를 낀 술자리를 가졌고,
따발총처럼 오고 가는 러시아어를 실제 상황 속에서 처음 보았고,
러시아인들 특유의 친화력을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바이칼 호수 노을 속 보드카 노상,
초면인 사람과 중개자 없이 즉석으로 가지는 술자리(내가 아싸니까 한국에서 못 겪어 봤을 수도...) 등
진귀한 경험을 처음 해 본 한편,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 다음날 인스타그램에 러시아어로 이런 게시글을 올렸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니 나도 어지간히 러시아어 못했다. 허헣.)
"혼자 안 무서워?"
"그래서 누군가 내 옆을 지나칠 때마다 가방 꼭 붙들어 매고 그래."
혼자 러시아를 싸돌아다니는 게 두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경험한 새로운 순간들과 느낌은 정말 좋았고, 좋고, 또 좋을 것이다. 지금은 아직 모든 게 순조롭고 모든 일들이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
러시아어를 열심히 배우지 못했던 게 후회되었다.
지금 보니 감성에 젖은 데다가 러시아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게 서툰지라 글이 막 적혀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렇다, 이 사실은 지금도 유효하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물론 안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대개 순조롭게 흘러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도 참 인복이 없진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니...
인복은 많지만 인복을 내찬다는 게 흠이지만... 주기적인 연락을 귀찮아하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 4명에게 정말 고마웠다.
말 잘 안 통하는 외국인 그래도 자기 나라 와 줬다고 특별한 걸 경험시켜줬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러시아어를 좀 더 효율적이게 공부를 하지 못했고, 좀 더 대담한 일을 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꼭 후회를 안 하고는 못 사는 법이다.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도 수많은 후회 속에서 좌절을 하지 않았던가.
과거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다.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인생의 시야가 넓어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보게 된다면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는 후회라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고,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후회를 발판 삼아 내 마음가짐이 바뀌게 되고, 그게 실천이 되면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성장을 하고 싶고, 그러기에 후회를 하고, 그러기에 지난 일을 잊지 않는다.
뒤끝 있다, 나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고들 혀를 차겠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실수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기에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
내 종교가 불교인만큼, 집착과 미련에 대해 긍정적이게 생각할 리는 없다.
즉, 내가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잊지 못해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이지,
지난 일에 묶여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저찌 되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것일까.
아가리만 산 거지 뭐.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