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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9월 중.

 

이 시국에 취업한 나도 참 대단하다 참말로.

 

2020년 8월 1일, 지독한 국난 속에 대도시에서 많은 걸 누려보겠다며 아무런 기반 없이 상경했다.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서울이라면 더 큰 자극을 받으면서 더 열심히 취업을 준비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패기와 깡, 젊음, 약간의 러시아어 실력만 믿고 상경을 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지원이라며 보증금 500만원과 한 달 방세를 내 주시고, 어머니는 걱정에 가득찬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거기서 단기 알바든 뭐든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겠다 다짐은 했지만, 상경일자가 다가올 수록 두려움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엄습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막상 서울로 올라가니 앞길이 어두컴컴했다. 

 

이력서를 써도 읽지도 않는 기업이 많았고, 읽어도 전화 한 통 없고, 토익 점수가 마땅치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알바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해 먹고 살지? 요즘은 편의점도 타임을 잘게 잘게 나누어 구하던데... 그걸로 생활이 되겠어?' 카페를 하자니 카페 알바 짤린 기억이 덮쳐와 두려웠고, 서빙을 하자니 아주 오래전 했던 호프집 사장님의 한숨이 불어닥치는 듯 했다. 번역 알바나 통역 알바가 있을까 해서 검색했더니 영어, 중국어, 동남아어, 일본어만 가득했다.


높은 일급으로 유혹해오는 택배 상하차 알바 공고글과 정직원 전환이라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전화 상담 알바..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된 일을 한다면 내가 과연 공부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거들떠 보지도 못했다.

 

나름대로 패기와 깡이 넘친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다. 

 

그렇게 담배만 뻑뻑 피워대면서 무기력하게 살았다. 당장 수중에 있는 돈은 얼마 안 되는데, 집에서는 공부가 안 된다는 부르주아적인 핑계를 대며 주변 카페에서 밥 먹을 돈 아껴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서 몇 시간씩 앉아 공부를 하다가 자기소개서 검토하다가 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구직앱에 들어가 일자리 좀 알아보다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으로 삼각 김밥이나 컵라면을 먹고 오후에는 카페로 가 주구장창 공부를 하고 해가 좀 질 때 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알바몬이든 알바 천국이든 잡코리아 사람인 이런거 뒤적거리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2019년 4월에 있었던 수행 경험을 높게 쳐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모델하우스 쪽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을 하는 지도 정확히 모른 채 급한 마음에 신청한 데에서 이렇게 연락이 온 것이다. 내일 1시간 일찍 나와서 교육 받으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끝냈고, 한동안 펄쩍펄쩍 뛰었다. 일주일에 하루 쉰다고는 되어 있었지만, 거의 하루도 안 쉬고 일 했다고 보면 된다. 수행일이라는 것만 안 채 그 다음날 양복 쫙 차려입고 모델하우스로 갔다. 엄청 호화스러운 인테리어에 분양대행사 직원들과 알바생, 프론트맨들이 뒤엉키면서 정신 없는 분위기를 보고 그대로 벙 쪘다.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지? 누굴 수행해야 하는 거지?"

 

도착하고 주간 알바분께 전화를 드리니 검은 양복입은 남자분이 다가오셔서 내게 인사를 하시고 직원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냥 거기 대표분 계시는데 파우치 들고 그 분 졸졸 따라다니면서 담배 달라 하면 담배 주고 명함 달라 하면 명함 주시면 돼요."

 

수행직이라는 게 변수가 무수하다 보니 주간 알바분도 설명을 하는데 곤혹을 느꼈다. 회의실에 계시는 동안에 나한테 와서 자잘자잘하게 이것 저것 가르쳐주다가 전화가 오면 바로 뛰쳐나가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설명으로는 부족해요. 일단 한 번 해보셔야 하는데..."

 

그렇게 6시까지 쭉 앉아 있으면서 쉬고 있는 여직원이랑 일에 대한 이것 저것 이야기를 들었다. 엄청 바쁘시고 많이 뛰어다니셔야 될 거라는 말과 함께 건투를 빌어주셨다.(?) 6시가 되었고 주간 분이랑 같이 근무를 섰다. 근무가 시작되자 마자 과장님이랑 팀장님이랑 인사를 나누고 주간 분이랑 같이 시행사 대표분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떤 일을 하는지 쭉 지켜보았다. 바에서 커피 달라 하면 커피 주러 가고, 선물 포장해달라 하면 선물 포장해주고... 그냥 '시다바리' 역이었다.

 

7시 쯤 되어서 조금 여유로워지자 쉬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저녁에는 극 귀빈들이 주로 오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실수 안 하게 조심해야 돼! 근데 대신에 자잘한 손님은 많이 없고, 있다고 해도 너는 그냥 대표님 손님들만 잘 챙겨드리면 돼."

 

다들 양복 쫙 빼입고 그런데 사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표님 수발을 들어주시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이 과장님이시고 나랑 거의 같이 움직이시는 분이셨다. 어찌 보면 내가 하는 일은 이 분이 하시는 일을 보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CEO로서의 가오용...같은?) 호쾌하시고 붙임성이 정말 좋으신 분이셨다.

 

그렇게 주간 알바분, 과장님, 건물 관리 팀장님, 분양대행사 대표님과 상무님이랑 회의실을 응시하면서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날이라 잔뜩 긴장해 있었는데 정말 잘 대해주셨다. 과장님께서 주간 알바생 분을 퇴근시키고 젤 처음 한 말이 이거다.

 

"이야! 넌 그냥 주간에 하는 애에 비하면 존나 꿀 빨면서 돈 버는 거야 아주 그냥! 밤에는 그렇게 안 바빠. 다만 실수는 최대한 하지 말고, 대표님 말에 귀 잘 기울이고 그렇게만 해."

 

솔직히 천운을 타고나긴 했다. 약 3주 정도 일을 했는데 힘든 건 크게 없었다. 바쁠 때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실수하는 것만 빼면...

 

사실 내가 의전했던 그 대표분께서도 막 갑질하고 그런 사람도 아니라 엄청 크게 스트레스 받고 그러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나한테 관심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 대표분이랑 직접적인 소통을 한 건 딱 한 번이었다. 어디서 왔냐? 학교 어디 나왔냐? 전공이 뭐냐? 그 쪽으로 일 찾아봐야지 뭐하고 있냐? 뭐 그 정도?

 

그렇게 거의 쉬는 날도 없이 일하면서 나름 이 일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귀감이 되는 것도 많았고. 아무래도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오기도 하고, 대한민국 최고 부자동네에서 일하다 보니 나도 열심히 일해서 이 정도 부자 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냥 열심히 살아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 누리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커졌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도 많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고.

 

대표분이 손님들 접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는 거의 쉬는 시간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과장님이나 팀장님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귀중한 조언도 많이 듣고 그랬던 것 같다. 온갖 별의 별 사람이 다 모여 살고 있는 차가운 도시 속에서 이런 인연이 생겼다는 게 참 애틋하기도 했다. 그렇게 낮 시간대에는 토익 공부와 컴활 공부를 하고(교재를 살 돈이 생김!) 저녁에는 알바를 하면서 푼돈을 벌기도 했다. 넉넉하진 않아도 방세랑 관리비 내고 빡빡하게 살기엔 부족하지 않은 정도로 벌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10일 단위로 돈을 지급해줘서 급여를 받으려고 목빠지게 기다릴 필요도 없어서 여러모로 취준생 입장으로 굉장히 할만한 알바였다. 취업 준비와 인생 공부를 할 수 있었달까. 첫 발걸음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 집회로 그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함에 따라 실내 인원 제한이 생기면서 알바들이 무더기로 짤렸다. 인원이 줄어드니 줄어든 인원의 일을 내가 도맡아서 하기도 했다. 그렇게 평소보다 바쁜 일이 계속 진행되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도 결국 일자리를 잃었다. 피치 못할 사정을 차마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간에서 쓰지는 못해 나와 같이 일했던 분들 속에 묻어두기로...

 

순조롭기는 개뿔.

 

그렇게 나는 상경 초기와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 전에 모아 두었던 알바 급여로 겨우 연명하면서 카자흐스탄에서 지냈을 때 처럼 음식을 해 먹었다. 다행히 집에서 반찬을 보내주었고, 알바 급여로 밥솥을 사서 예전처럼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연명하고, 아메리카노로 대충 배를 채우고 그러진 않았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앞날에 대한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져 갈 뿐이었다. 토익 점수가 하루 아침에 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학원을 다니나, 학원 다닐 돈 없어서 독학을 하는 판에, 내가 언제 컴활을 따고 언제 토익 850 이상을 받겠는가. 알바자리는 더욱 더 없어지고, 경쟁률은 더 치열해지고, 아주 가끔 보이는 러시아어 번역 알바도 지원해봤지만 나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집 옥상으로 올라가 매번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오는 밤이 마지막이었으면. 아침해가 뜨면 각자의 위치에서 바삐 움직이는데, 나는 아무런 수완도 없이 돈만 축내고 있으니. 차라리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고, 다시 시작하거든 꼭 나같은 놈으로 살지 않기를. 음악한다고 객기도 부리지 말고, 고등학교 때 공부 존나 열심히 해서 인서울 가서 더 많은 것을 누려보고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이 좆같은 생활을 시작해야지. 부모님한테도 부끄럽고 나 자신한테도 부끄럽다. 코로나로 어렵다 한들 살 사람들은 다 사는데. 그냥 결국 나만 뒤처지는구나. 왜 러시아어를 선택해서... 차라리 공대를 갈걸. 후회되는 게 너무나도 많네. 정말 살기 싫고 사는게 두렵고 자신감도 자존감도 밑바닥을 치는구나. 부모님은 이다지도 열심히 사는데, 왜 나는 부모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아둥바둥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난 그런 사람이지 못한 거지. 왜 이렇게 겁 많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지. 비겁할 정도로 겁이 많았지 하긴. 돈 쓸때는 패기가 넘쳤지만, 돈이 없으니 패기고 자신감이고 완전히 밑바닥 치는구나." 

 

부모님한테 손을 벌려야 겠구나 생각이 들자 알바 짤리고 막막해하는 심정을 헤아려 주신 건지 40만원을 보내주셨다. 기쁘다는 생각 보다는 부끄러움 뿐이었다. 패기 넘치던 27살은 어디 가고 이렇게 손이나 벌리고 있으니 말이다. 더이상 부모님 등골 휘어지는 거 보기 싫어서 한시라도 빨리 독립하고자 서울로 간건데 이렇게 나한테 들어가는 돈만 더 커지고. 배를 조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아니, 편한게 존나 이상한 거지.

 

그렇게 퀭하게 살아오다가 9월 말 쯤 될 무렵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왔던 당일 아침 러시아어 번역 알바를 2개 지원했었다. 희망 따위는 없었다. 그냥 슥 보고 지나가고 말겠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에 지원을 했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무작정 지원한 거고 번역 일이라고 하니까 재택으로 가능하겠지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재택은 안 될 것 같고 출근을 하셔야 되는데, 신림이라... 흠... 거리가 좀 멀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재택인 줄 알고 지원했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교통편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러라는 말과 함께 재빨리 회사 주소 쳐서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봤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 10분, 왕복 6400원 정도 책정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고 시급이 만원이니 조금만 고생해볼까? 일단 먹고는 살아야 되니. 1주일 바싹 일하면 방세랑 관리비는 벌겠네.'

 

다른 사람한테 일자리 뺏길까봐 잽싸게 전화를 걸었고 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러시아어는 얼마나 하냐, 엑셀 다룰 줄 아냐는 질문을 하면서 무던한 면접이 이어가던 중 갑자기 잠시만요! 하고는 나오는 말이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Алло, здравствуйте."

 

아주 잠깐 동안 뇌정지가 왔다. 공연단 에스코트 이후 처음 러시아어로 하는 대화라 긴장이 많이 되었다. 거의 1년 만인 것이다.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 면접에 임했던 것 같다. 러시아어 얼마나 했는지, 유학 경험 있는지, 번역 경험 있는지 대략적인 것 좀 물어보다가 어떤 내용을 번역해야 하는 지 설명해줬다. 건축 자재 용어 번역이라는 말이라는 것에 한 번 더 뇌정지가 왔다. 사실 그 쪽으로는 문외한이니까. 한국에 있는 우즈벡 노동자랑 아는 사이고 몇 번 도와준 기억이 있어서 기초적인 용어는 알고 있다고 대충 둘러대니까(팩트임) 일단 알겠다고 하고 다시 한국 직원에게 바꿔줬다.

 

"이따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마치 에이즈 검사 결과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폰을 붙들고 있었다. 정말 간절했다. 알바라는 건 둘째 치고 러시아어와 관련된 경험으로 이력서에 한 줄 작성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희망의 끈을 놓았다 붙잡았다 하면서 발을 동동 굴리고 폰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떤 채 제발 제발 하면서 폰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윽고 진동이 느껴졌고, 바로 잽싸게 받았다.

 

"내일부터 일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아 저 그리고 주말에도 일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네 그러면 내일 9시에 뵐게요."

 

알바몬에 적힌 내용과는 달랐지만 (거기엔 10시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월~금 근무라고 되어 있었음.) 오히려 한 시간 치 더 받고 이틀 치 더 받으니 난 좋아라 하고 다 괜찮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했다. 출근 지하철을 타면서 마치 회사원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금 내가 취업한 회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땐 몰랐다. 그냥 적당히 번역일 하면서 방세나 벌자는 심정으로 갔으니까.

 

생각보다는 넉넉하게 도착했었다. 소요시간을 1시간 반으로 잡고 갔으니까. 그런데 회사 문이 닫혀 있었다. 9시 정각이 되어도 직원들이 오질 않았다. 순간 벙쪘다. 나 사기당한 건가? 아님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건가? 하지만 장소는 딱 맞았다. 회사도 알바몬에 명시된 그 회사가 맞았고. 계속 기다리다가 9시 10분 쯤 되니 대리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성분이랑 부장 쯤 되어보이는 아저씨 분이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저... 그... 번역 알바로 왔는데..."

"아, 네 안녕하세요. (도어락 엶) 들어오셔서 잠깐 앉아 계세요."

 

긴장이 좀 많이 되었다. 건축 용어 번역이라니... 무슨 내용이 나올까... 회사에서 어떤 사업을 하는 지 볼까 하고 벽에 걸린 사업 개요라고 해야되나 아무튼 그런 걸 유심히 봤는데,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내가 저런 걸 번역해야하나 하고 엄청 똥줄을 탔다.

 

"와 X발 좆됐네."

 

그렇게 똥줄을 타고 있던 중 중년 여성분 한 분이랑 젊은 여성분 한 분이 들어오셨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번역 알바생이신가요?"

"네."

"아 그럼 잠시 회의실에 앉아 계시겠어요? 이 컴퓨터로 작업하시면 되시고요 ~@#@$%... 커피라도 좀 드시겠어요?"

"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드ㄹ.."

"어떤 걸로 드릴까요? 믹스?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지만) 믹스로 부탁드릴... 아 제가 타 먹을게요."

"아녜요, 앉아 계세요."

 

알바생이 나밖에 없는 게 좀 이상했다. 거리가 멀어서 지원자가 적은 건가 싶기도 했다.

 

"저 혹시... 알바생이... 저 밖에 없는... 건..가요?

"아 계속 구하는 중이에요. 현재로써는 그렇네요."

 

노트북을 펼치고 잠시 앉아있었다. 다리를 동동 구르며 똥줄을 타고 있었다.

 

커피를 타 주시고는 여성분 두 분이 들어오시고는 어떤 내용을 번역할 지 보여드렸다. CIS 모 국가 시공사 측에서 보내준 세부 내역서 파일이었다. 고려인으로 보이는 어린 여성분이 각 건물 파트마다 필요한 부품들이 나열되어 있는 엑셀 파일을 보여드렸다. 어찌 될지 몰라 그 전날에 건축 자재 용어 공부를 좀 했는데 그게 살짝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X됐다는 심정은 여전했다. 애써 태연한 척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헬게이트가 오픈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봐도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 자재품이나 기계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인 분께 이거 혹시 뭔지 아냐고 사진을 보여줘도 그 분도 약간 확언을 못하시는 듯 했다. 그 분도 인터넷에서 찾고 찾아 구글 번역기 돌리고 어찌 돌리고 돌려서 겨우 용어를 알아내시는 것 같았다. 뭔가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나만 쩔쩔매는 게 아니었구나. 고려인 분도 정말 애매하다 싶은 걸 건너편에 앉아 계신 중년 여성분께 물어보시곤 했다. 그 분은 그래도 이쪽 계열에서 짬이 있으신 분이라 나나 고려인 분 보다는 더 잘 아셨지만, 그 분도 이게 뭐지 하면서 좀 더 짬이 있으신 분께 여쭤보시곤 하셨다. 처음엔 좀 물어보는 게 꺼름칙했지만(내 러시아어 밑천이 드러날까봐),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거나 알아봐 주셔서 나중에는 그냥 서스럼없이 여쭤 보았다. (물론 끝나고 난 뒤 용어를 정리하는데 틀리거나 애매하게 번역된 게 꽤 보였다.) 그 분도 어느정도 이해하시는 듯 했다.

 

"얘내 왜 이렇게 세세하게 나누고 그래. 우리나라 같으면 포괄적이고 직관적이게 딱딱 작성하는데, 얘내들 너무 비효율적이게 일을 하는 것 같아. 일단 번역본 확인하는 회사 측에서 알아서 알아차릴테니 할 수 있는 데 까지만 해보세요."

 

번역하는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하셨는지, 야박하게 굴고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빨리 해달라고 재촉도 하지 않으셨다. 고려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 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많아요. 하하핳;;;"

 

상부에서 빨리 번역하라고 재촉을 하고 그러니 앞에 중년 여성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듯 했다. 뭔가 예감이 살짝 오긴 했다.

 

'야근 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 하루 일과가 끝날 때 쯤 야근 이야기가 나왔다. 정말 돈이라는 게 급박하니 오히려 야근을 하고 싶었다. (야근 수당 안 쳤으면 당연히 때려 치웠다.) 미소를 살짝 지으면서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속으로는 기뻐서 펄펄 뛰었다. 점심 저녁 제공해주지, 야근 수당 주지, 어차피 집으로 가면 침울하게 유튜브 보고 일자리 뒤적거리며 비생산적이게 지낼 게 뻔한데 그럴 바에 돈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그렇게 약 9시 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복귀하자 마자 거의 바로 곯아 떨어졌다.

 

주말에는 고려인 분이 생일을 맞으셔서 나와 그 중년 여성분이랑 둘이서 일을 했다. 셋이 있을 땐 그래도 고려인분이랑 중년 여성분은 직원이라 통하는 거라도 있겠지만, 그 분과 단 둘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약간 부담스럽긴... 했으나, 생각보다 중년 여성분이 말이 많으셔서 어색한 기조는 딱히 없었다. 성격이 예전에 서점 알바 했을 때 나한테 잘 해 주셨던 이모분과 성격이 많이 비슷해서 (외모 조차...) 그런가 말을 붙이는 게 어느 정도 편했다. 

 

"우리 회사가 원래는 야근을 잘 안 해요. 제가 야근을 엄청 싫어하거든요. 근데 어우,,, 계속 빨리 제출해달라 재촉을 하니까... 그 사람들은 이거 번역해달라 하면 번역기 돌리듯이 술술 나오는 줄 알아요."

 

토요일 일과도 번역하다가 가끔씩 수다도 좀 떨다가 하면서 진행되었다. 주말에는 야근을 시키진 않으셨고, 이 중년 여성분도 많이 힘드신지 내일(일요일)에는 9시부터 6시까지 금액으로 쳐 주겠다고 하시면서 재택으로 하자고 말씀하셨다. 다행히 1주일 풀 출근은 아니구나 싶었다.

 

재택 근무는 생각보다 좀 빨리 끝났다. 중복되는 단어가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해서 첫번째 두번째 내역서 번역할 때 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더군다나 내용도 짧아서 우선에 고려인 분께서 보내놓은 파일을 다 끝내 4~5시간만에 끝낸 뒤 휴식을 가졌다.

 

그렇게 주말이 흘러가고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12시간, 13시간을 회사 안에서 번역을 하며 보냈다. 날이 갈수록 많이 피곤해지긴 했지만, 생활비를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회사 생활을 짧고 굵게 경험해보자는 일념으로 그 기간동안은 주인의식을 가지면서 했던 것 같다. 회사에서 하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회사 생활 이야기도 좀 듣고 고려인 여성분이랑 대화하면서 러시아어 감도 조금씩 익혀가면서 아주 직원과 다름 없을 정도로 융화되었다. 정말 고되긴 했지만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나한테 폐 끼치지 않고, 심지어 거의 하루종일을 같이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고려인 분이랑 이사님(중년 여성분)이랑은 '야근 정(?)'이라는 게 생긴 것 같다. 고되긴 했지만 "아 ㅅㅂ ㅈ같네"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그 기간 동안은 나도 이 회사의 직원이 된 느낌이었다. 중소기업이 다 좆소기업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중에 취업을 하게 되면 이런 분위기의 회사였으면 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야근을 당연한 듯이 하면서(물론 그 와중에 시간 계산은 철저히 했다), 방세 벌 목적으로 시작한 게 한 달 생활비 규모로 커져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내 몸이 부스러질지 언정, 일단 나는 먹고 살아야 되니까. 회사 분위기도 그렇게 묵직한 분위기만은 아니라 즐겁게 임했던 것 같다. 퇴근할 때 택시비도 따로 청구해주고 그래서 힘들게 번게 택시비로 다 빠지고 그런 것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하루에 쓰는 생활비가 줄어들어 돈 굳었다 하면서 속으로는 비보잉을 하고 있었다.

 

야근 마지막 날에는 번역이 끝나 엑셀 작업을 시작했는데, 원래 정시 퇴근이 목적이었으나 수식이 어디에선가 꼬여가지고 역대급 야근(!!)을 해버렸다. 막차까지 놓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수식 작업까지 끝나고 완전히 끝났나 싶었는데 그 다음 날까지만 나와달라고 해서 네 나오겠습니다 하고 퇴근을 했다.

 

사실 뭔가 잡히는 게 좀 있었다. 첫 날에 회장님이랑 담배를 같이 피면서 이야기가 오갔었다.

 

"혹시 취직은 어디 쪽으로 하시려고요?"

"무역 회사쪽으로 생각 중이긴 합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아... 혹시 러시아어권으로 진출하는 회사에 취직할 기회가 생긴다면 할 의향 있으신가요?"

"그렇게 된다면 저야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저희 회사는 #@$%^&$##@%^&*&%$#, 혹시 생각 있으시다면 알바 끝날 때 쯤 이력서 제출해 주시면 면접 기회를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 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참 자존감이 낮아 있었을 시기라 "그냥 해 보는 소리겠지"하고 넘어갔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G씨, 회장님 실로!"

 

얼떨떨해서 회장님 사무실로 들어가니, 혹시 같이 하실 의향 있냐고 물어보셨다. 짧고 굴게 "네!"하고 대답했고, 그럼 이력서 적어서 이사님께 제출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추석이 끝나고 한 번 검토해보고 면접 일자 말씀드리겠다고 하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로 들어가 이력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G씨,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 이력서 작성해 보려고요."

 

이사님께서 질문하셨을 때 쯤 직감했다. 나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드시긴 한 거구나.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컴컴하기만 했던 앞길에 반딧불이의 불처럼 미미한 빛이라도 들어온 듯 했다. 이사님은 어떤 사업인지 나한테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고려인 분이랑 같이 사업계획서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 어떤 프로세스로 일이 진행되는지 대강 들었다. 내가 마치 이 회사 정직원인 것처럼 나한테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하셨다. 파워포인트랑 엑셀도 좀 공부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시기도 하셨다.

 

'대기업이고 중견이고 다 좆까라 그래,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많은 기업들이 나를 외면한 와중, 이렇게라도 손을 내밀어 줬으니, 앞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자. 애초에 돈 욕심도 그렇게 많지도 않고, 나 하나 풀칠할 정도면 되니, 이 정도도 존나 감지덕지 아니야? 대체로 첫 직장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첫 직장이 중소기업이면 어떻고 대기업이면 어때. 무역회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부모님 등골 더이상 휘지 않길 원하는 자발적인 가난뱅이 입장에서 내 적성이고 기업의 평판이고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내가 내 입에 적당히 풀칠하면 그 때 쯤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이직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내가 이직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아. 눈이 좀 낮으면 어때, 눈만 높혀가며 백수로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뭐라도 경험하고 조금이라도 더 벌면 그걸로 된 거 아니야? 내 생각이 너무 철이 없나? 철 없다고 쳐, 그럼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 나 대기업 중견기업 갈 때 까지 지원해줄거야?'

 

이력서를 다 작성하여 이사님께 보내주고, 알바비를 모두 받고, 알바를 한 기간 동안 평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시에 퇴근을 했다.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워졌고, 그제서야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 구디에 사는 친구랑 오랜만에 삼겹살도 구워먹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간만에 서울 노을이 아름답게 비쳐졌다.

 

그렇게 추석 기간동안 착잡함보다는 약간의 외로움으로 보내고, 면접 전화가 올 때 까지 기다렸다. 하염없이. 왜 하염없이냐고? 추석이 끝난 뒤 2~3일 만에 이력서 검토하고 연락주겠다고 했는데 그 2~3일만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날 이용한 거구나. 이렇게 희망고문을 시키는 거구나.'

 

설상가상으로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아 면역력이 약해져 지병도 생겨버렸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하는 셈이다. 병원비로 알바로 번 돈이 반토막나고, 면접 전화는 오지 않아 다시 토익책을 집어 들었다. 알바몬을 뒤적거리고 잡코리아, 사람인을 뒤적거렸는데 예전보다 일자리가 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평소처럼 연락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뭐 그렇지'

 

이미 자포자기했다. "그래, 더 준비해서 더 좋은 데 가보자. 알바라도 해야지 돈은 벌어야 하니까."

그렇게 또 다시 침울하게 하루 하루를 허비하다가 일요일 밤에 이사님께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통화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보네 하는 순간 훅이 들어왔다. 외국으로 출장간 뒤 돌아와 자가격리 중이셨는데 일이 바빠서 한동안 전화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셨다. 금액 협상을 하고 이것 저것 물어보다가 이력서가 너무 간략해서 자기소개서 자유양식으로 좀 써서 제출해라고 하셨다.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하셔서 말 그대로 이력서만 제출했다. 그게 마음에 많이 걸리긴 했다.) 그 다음 날 이력서를 보충하고 이사님께 보내주시니 내게 전화를 주셨다.

 

"G씨, 다음주 화요일부터 출근하세요."

 

그렇게 나는 수습직원으로나마 취업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떠오른 건 모델하우스에서 만난 과장님의 말씀이었다.

 

"뭐든지 주인의식이 중요해. 매사에 주인의식을 가지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집 주위 카페에서 역대급 민폐를 부리면서 이 글을 작성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