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 중에 감성이 쌓이는 이유는,
한 낮 중에 감성을 소모하기 위함이라.
- 본인의 뇌피셜
또 다시 길고 긴 시간을 차에서 보냈다.
왔을 때 처럼 중간 휴게소에서 밥을 먹고,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친절하게도 운전기사가 호스텔 앞에 내려주는 바람에 길을 크게 헤매지는 않았다.
호스텔에 짐을 풀고, 조그만 관광지도만 가지고 무작정 나갔다.
이르쿠츠크에 있을 시간이 1.5일로 그렇게 길진 않으니까.
제정에 반대했던 지식인, 데카브리스트가 활동했던 도시, 확실한 건 블라디보스톡보다는 규모가 있었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도시, 그래서 집이 몽땅 타 버려가지고 울먹이며 구걸하는 노숙자를 만났나 보다.
박물관이라도 좀 둘러볼까 했는데, 문이 잠겼댄다. 하긴 저녁 6시 10분 전이면 닫을 시간대이긴 하지.
방치된 목조건물을 꽤 흔히 볼 수 있었다.
방치된 건물은 방치된 건물대로 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까.
잠깐 산책하면서 느낀 것은, 건축물에서 "여기는 이르쿠츠크다!"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는 것이다.
25년 동안 한국에 눌러있었던 토종 한국인에게는 정말 새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보다는 전체적으로 건물이 낡은 느낌이 강했다. 스타일도 약간 18세기에 걸맞기도 했다.
건물 색상들이 우선 다채로웠고, 전봇대에 놓여진 꽃바구니처럼 디테일도 있었기에
벌써 유럽이라도 온 것 같았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이런 도시가 세워졌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지.
바이칼에서 오는 길에 렌즈 뚜껑을 잃어버렸었다.
조금 둘러보다가 바로 사진관을 찾아가 렌즈 뚜껑을 샀다.
뚜껑을 사고 나니, 뭔가 허기가 져서 스탈로바야로 간 뒤 저녁을 먹었다.
지금 같으면 저렇게 무대뽀로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배 터졌던 걸로 기억난다.
밥을 다 먹고 숙소로 복귀했다. 빨래를 좀 돌리려고 했는데 여느 게스트하우스가 그렇듯 유료라서 안하기로 했다.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하다 시피 해서 바이칼에서 처럼 빨래 시설을 공짜로 이용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여행을 계속 하면서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안 찍은 사진 정리도 좀 하고, 다음 날 나갈 준비를 미리 해놓고 일찍 잤다.
그 다음 날 하루종일 돌아다니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게스트하우스를 나가 역에다 짐을 맡긴 뒤 중심지로 나왔다.
도시 구경은 키로브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어디로 갈 지 대강 계획하고, 가톨릭 교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석탄회사 건물 반대편에 이르쿠츠크 시청이 있고, 그 뒤로 쭉 가다보면 꺼지지 않는 불꽃, 주현절 성당과 앙가라 강변과 마주하게 된다.
강변에는 모스크바 개선문이 있다고 하고, 거기서 방향을 틀면 이르쿠츠크 중앙 시장이 있다고 한다.
사실, 지도랄 것도 크게 필요하지 않은게, 안내 표지판이나 관광안내선이 잘 되어 있어서 그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가면 됐었다 그냥.
앙가라 강 쯤 왔을 때 뭔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아침에 역에 짐 맡기러 갔을 때
짐 보관소 직원이 잠시 부재중이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눴던 여자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나한테 짐 맡기는 비용이 얼마냐고 물었었고
내 국적을 물어보고 뭐 짧진 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안면이 있었던 거 보니.
그래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 역에서 뵈었던 분 아닌가요?"
그러더니 화들짝 놀래더라. "산책중이셨네요!"
그 여자도 잠시 이르쿠츠크 도시를 둘러보는 참이어서
이것도 인연인데 동행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쑤다볼스비옘!"
그렇게 또 우연찮은 인연이 만들어졌다.
이름은 니나, 중국에서 유학생활 마치고 막 이르쿠츠크 공항으로 귀국한 대학생이었다.
집이 치타(Чита)에 있어, 이르쿠츠크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되는데, 기차 시간 기다릴 겸 산책중이라고 했다.
저녁 쯤에 가톨릭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공연 보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유료였나 그래서 아쉽게 거절했다.
같이 모스크바 개선문까지 좀 걷다가 어디갈까 어디갈까 하다가 가장 관광지스러운 곳인 130지구로 가기로 했다.
가는 김에 중앙시장 쪽 어떤 상가에 들어가 밥도 먹었다.
그냥 간단하게 솔랸카랑 빵이랑 이렇게 주문했던 것 같다.
니나는 '부즈'라 불리는 왕만두를 주문했는데,
마치 한국인이 한식을 그리워했듯 고향의 맛이 그리웠다면서 기뻐하곤 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예언을 했다.
"너도 카작에서 1년 공부하고 한국 돌아와서 너네 나라 음식 먹으면 지금 내 말과 행동이 다 이해갈거야!"
1년 동안의 해외생활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김치찌개 먹었을 때 그 느낌이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당시에는 이해하는 척 했지만.
동행을 하게 된다면 추억이 남는다는 장점은 있어도, 사진을 많이 못 찍는다는 단점이 있다.
같이 수다 떠느라 사진 찍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핑계아닌 핑계겠지.
그래서 130번지구로 가기 전까지 사진을 그렇게 많이 남기진 못했다.
강변에서 130번지구까지는 꽤 거리가 되었다.
햇빛은 미친듯이 내려쬐고, 땀은 미친듯이 흘러댔고,
그늘이나 햇볓이나 별 차이없는 찝찝함에 익숙한 나에게
니나가 그늘로 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 지 모르겠다.
"안 더워? 그늘로 다녀! 그늘은 좀 괜찮아."
니나에 의하면 '담비를 물고 있는 바브르'가 이르쿠츠크의 상징이라고 한다.
전설 속의 동물이라는 것만 알고, 나머지 내용은... 왜 기억을 왜 못 해 먹는거니!!!
아무튼 130지구로 왔는데, 그 전 날 본 이르쿠츠크와는 달리 새 것의 냄새가 많이 났다.
관광지가 뭐 다 그렇지, 니나가 말했다. "거 봐, 별 거 없지? 비싸기만 비싸."
기념품 좀 구경하려고 상점에 들어갔는데, 수제라 그런건 지는 몰라도 가격이 꽤 셌다.
당연히 그 정도 가격 할 줄 알았는데, 니나 피셜에 의하면 엄청 비싸게 파는 거라고 한다.
130지구까지 가서 건진건 나는 사진 몇 장(별로 찍지도 못했다.), 니나는 코인 하나.
이르쿠츠크에 있을 때 까지라도 기념품은 사치라 생각을 해서, 마그네틱 조차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념품은 사치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그네틱 정도는 사는 편이다.
가격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고,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니.
130 지구를 대강 구경하고 몸 좀 식힐 겸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기하면서 걷다가 마트가 보이길래 구경이나 하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관광지라 가격을 너무 올려친다고 하소연했다.
다과 코너에서 원서 교과서로만 접했던 '할바'가 있길래 할바에 대해 잠시 얘기 나누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할바를 하나 샀다.
제피르도 맛있어 보여서 샀지만... 노보시비르스크 가는 기차에서 달아 디지는 줄 알았다.
마트를 나가고 나니 화장품 가게가 보이길래 바디워시가 없다는 걸 깨닿고,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니나의 추천으로 러시아 브랜드... 뭐지 그 석류 향 나는 바디워시 하나 샀다.
브랜드 이름을 까먹을 걸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찍어 놨어야지. ㅠㅠ
한국 여타 바디워시랑 가격이 비슷한데, 러시아의 싼 물가에 익숙해지다 보니, 엄청 비싸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바디워시까지 사고 나간뒤, 130지구를 벗어나 키로브 광장으로 또 걸어 걸어갔다.
저녁에 있을 파이프오르간 공연을 봐야되기 때문이다. 물론 니나가.. ^^
사실 나도 정말 보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르쿠츠크 도시를 더 감상하고 싶어서 동행은 이 쯤에서 끝냈다.
물론 바로 헤어진 건 아니고,
키로브 공원 벤치에서 좀 앉아 헤어지기 전 마지막 수다를 좀 떨고,
인스타 계정을 맞교환 한 뒤 떠나보냈다.
여럿이서 여행을 가면 그 사람들끼리의 추억을 쌓게 된다는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고
홀로 가면 낯선이와 추억을 쌓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런 우연찮은 인연도 운이 좋을 때 생겨난다. 하지만 꼭 동행이 필수라는 건 아니잖아.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일상 속 관계의 끈에서 잠시동안 벗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 이유 하나로 나홀로 여행의 목적을 단정지을 순 없지만,
앞서 언급한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이유이긴 하다.
너무 먼 곳에 있어 드물게 만나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그 이유가 되고
너무 먼 곳에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사랑하는 이를 보러 가는 것도 그 이유가 되지만,
나홀로 여행만이 가지는 매력은 바로 '낯선 동행'이다.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다른 이를 만나며 뭉쳐있는 근육을 풀듯 경직된 사고를 풀어헤치는 것,
그것이 동행이 정해진 여행에서는 느끼기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혼자 감상에 젖는 것도 좋고, 혼자 사색에 빠지는 것도 좋다.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여행 계획을 짜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예상치도 못한 인연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디마 아저씨, 횡단철도에서의 칭기즈, 알혼에서의 한국인 2분과 유람선 메이트, 숙소 관계자분들.
그리고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만난 중국 유학생 '니나'.
앞으로 당면하게 될 모든 일에 축복이 가득하길.
중국어 공부에 더욱 더 정진해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인스타 아이디가 추가되어 있어서 언제든 연락이야 할 수 있겠지만,
일상 속에 갖힌 나는 썩 사교적이진 못하다.
니나 사진에 좋아요나 눌러줘야지.
존나 소심하기는...
니나를 떠나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즈나멘스키 성당까지 강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물 사람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강변이 있으면 걷지 못하고는 배기지 못한다.
여기서 한 40분 더 걸었던 것 같다.
보통 카잔 성당으로 많이들 가는데, 나는 이 곳을 선택했다.
그냥 순전히 앙가라 강을 걷고 싶었기 때문.
생각한 대로, 조용조용했다.
벤치에서 책 읽는 사람들이 가끔 보일 뿐.
사제들만 몇 명 좀 보일 뿐.
심적인 고요함에 흠뻑 취한 뒤, 다시 되돌아 갔다.
9시 경에 기차를 타야 했으니.
그렇게 즈나멘스키 사원까지 왔다갔다 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구보를 뛰는 청소년들, 부부 혹은 연인끼리 산책 나온 사람들, 아이들 데리고 노는 부모들,
낚시하는 아저씨들,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강변을 걷고 있었다.
강은 늘 옳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곳.
이제 기차역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걸어서 가면 시간이 딱 될 것 같았기 때문.
조금 더 여유롭게 둘러보기로 했다.
해는 늦게 질테니.
약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던 것 같다.
거의 시간에 맞게 도착을 했고, 새로운 인연을 고대하며 기차를 기다린다.
이르쿠츠크, 아니, 자바이칼주는 그렇게 내게 수 많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었다.
또 한 번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능하겠지. 다음엔 부모님 모시고 한 번 가고 싶다.
바이칼 호수라면 부모님 취향에 딱일지도.
자, 이르쿠츠크야, 잘 있거라. 나는 이제 노보시비르스크로 간다.
노보시비르스크 당일치기 하고 예카테린부르크로 간다.
체력 또 아작나겠군. 아니, 아작났다...